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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흙의 나라 캄보디아 |
2009년06월29일(月)16시4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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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 강영숙이라고 합니다. 나카자와 케이 씨의 홈페이지를 즐겨 찾으시는 분들께 쑥스럽게 인사를 드립니다. 서울과 사람들, 여행과 문화를 소재로 한 재미있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신인이고 인생 경험도 많지 않습니다. 다만 괜찮은 체력을 바탕으로 버텨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아무런 기획의도가 없는 순수한 교류의 차원에서 씌어진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카자와 케이 씨가, 또 제가 그냥 재미있는 일을 해 보자고 해서 하는 일입니다. 지난해 9월, 서울에서는 대산재단의 주최로 “현대사회와 문학의 운명-동아시아와 외부세계”라는 주제의 한중일 문학포럼이 열렸습니다. 아직 신인인 저에게는 여러 훌륭한 아시아의 작가들과 함께 한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나카자와 케이 씨와는 2007년 도쿄에서의 만남 이후로 일 년 만이었고 한국의 여러 작가들과 함께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후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그때 만났던 작가들의 소설을 천천히 읽으며 다른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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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연말이 되면 서울 북쪽의 춘천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곤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호수와 안개가 많은 춘천에서 보냈습니다. 어릴 때는 육상과 배구 등 주로 운동선수로 지냈고 열다섯 살 때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춘천은 <겨울연가>의 준상이네 집이 있기도 해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기도 하는 조용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춘천에 가는 대신 캄보디아에 다녀왔습니다. 새해부터 새로운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뭔가 각오도 필요했구요. 저와 여행을 함께 간 소설가 이혜경 씨는 인도네시아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며 산 적이 있는 동남아 전문가였습니다. 그녀는 씨엠립 공항에 내린 첫날의 숙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 가 직접 숙소를 찾는 방식으로 여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스릴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캄보디아 남자들은 저를 태권도 선수이거나 운동선수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덩치 큰 아시아 여자를 쳐다보는 경계의 눈빛을 봤으니까요. 우선 캄보디아는 어디서나 불쑥 눈에 들어오는 너무나 붉은 흙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흙이 어쩌면 저렇게 붉을 수 있을까! 붉디붉은 흙만으로도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긴 구슬로 꿰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 옷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릎 높이까지 붉은 흙이 묻어 있었습니다. 앙코르와트 주변 사원을 사흘간 순례하고 지뢰박물관에 가는 게 시엠립에서의 일정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수도인 프놈펜으로 가 왕궁을 보고 킬링필드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다음 날은 남쪽의 바닷가 시하눅빌까지 갔고 거기서 이틀을 쉬고 프놈펜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습니다. 매연과 오토바이 사이를 뚫고 올드 마켓에 들러 열대과일을 샀고 앙코르 맥주도 자주 마셨습니다. 맛있는 식당 한 곳을 발견해 그 집에서 두 끼 식사를 했는데 아뿔싸, 주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갔던 우리는 비위생적인 풍경에 얼굴이 하얗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장염은 안 걸렸잖아! 우린 그냥 즐겁게 넘겼습니다. 가는 곳마다 물건을 파는 어린애들, 지뢰 폭발 피해자들, 구걸을 하는 거지들을 만났습니다. 어딜 가나 어린애들이 달려와 ‘원 달러’를 외치며 물건을 팔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엔 ‘그럼 캔디라도 하나 달라’고 외쳤습니다. 다들 굉장히 똑똑하고 예뻤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출판된『시하눅빌 스토리』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인도차이나에 관심이 많은 작가 유재현 씨의 작품으로 시하눅빌을 배경으로 “세계사에서 소외된 아시아”를 다룬 소설집이었는데, 이사 직전이라 아직 그 책을 찾지 못했지만 꼭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연일 날씨는 뜨거웠습니다. 시하눅빌의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뜨거운 날씨라면 문학을 하긴 어렵겠군.’ 저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여자들이 다가와 손톱 손질이나 맛사지를 받으라고 계속 권했습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더니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더니 금세 어디서 남자애가 달려와 자기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시 후 여자들은 또 저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 주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네일아트, 맛사지를 외쳤습니다. 시하눅빌 해변에서 자유롭게 연말 휴가를 즐기는 서양인들처럼 되지도 못하고, 몸은 파란 바다 한가운데 떠 있으면서도 심리적으로 굉장히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아, 나는 역시 시골 출신이라 놀 줄도 모르는군! 하면서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시하눅빌의 메콩 익스프레스 버스 정류장에서 산타 모자를 쓴 직원들이 승객들에게 우산을 기념품으로 나눠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서양인들, 그리고 저도 같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리고 다리는 차창에 대고 오래된 필름 카메라의 렌즈를 밀고 당기는 동안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후지와라 신야의『인도방랑』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인도에서는 셔터를 많이 눌러서는 안 된다.” 뭔가 그런 구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실이 풍경으로만 남고 풍경으로만 완결되는 어떤 지점을 경계하라는 뜻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돌아오자마자 캄보디아 냄새가 그리워졌습니다. 캄보디아 냄새가 잔뜩 묻은 청바지며 티셔츠는 세탁기로 들어간 지 오래였지요. 그러다 문득 프놈펜의 오르세 시장에서 산 원두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붉디붉은 흙을 떠올리며 캄보디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커피에서 캄보디아 냄새가 났습니다. 아픈 어린애들을 받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어린이병원 앞에 모여 서 있던 아이들과 부모들의 얼굴이 붉은 메콩 강처럼 흘러갔습니다. 티베트에서부터 중국의 윈난,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흐른다는 붉은 강, 메콩 강의 붉은 굽이굽이를 상상하느라 오랜 시간 몸이 아팠습니다. 사실은 수영을 하다가 쉬러 올라간 바위에서 발가락을 베었는데 상처가 꽤 깊기도 했답니다. *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며칠 후 올해는 가지 말자고 했던 계획을 바꿔 결국 또 춘천에 가고 말았습니다. 연말연시면 자주 듣는 얀 갸바렉(Jan Garbarek)의 섹스폰에 실린 중세풍의 성가 음반 ‘오피시움officium’을 커다랗게 틀어놓고 북쪽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로부터 약 이십일 후 국도의 속도제한인 80을 넘겼다며 과속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10세기 전후로 캄보디아에 그런 이상한 사원을 만들어 놓은 크메르 인들의 기에 눌린 걸까요. 춘천에 간 저는 갑자기 과거라는 심연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감리교회, 수영장, 친구네 집-친구네 집이 준상이네 집 촬영지로 나왔던 교동의 그 골목길이라 우연히 춘천의 명소 또한 가 보게 되었습니다-등지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이 피곤한 게 제일이라는 제 인생의 유일한 철학을 기반으로 저는 또 의암빙상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앙코르와트 사원에만 가면 들려오던 그 이상한 고음의 매미소리,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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